진행자 vs 참가자, 정(靜) vs 동(動), 플롯 vs 커뮤니케이션, 대립과 상생.
최근 로키님이나 CBM님, 천승민님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은, '역시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서로 대립해야 하는 관계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최종보스를 죽였으니 플레이어 승리!" "마스터의 손바닥에서 플레이어가 놀아났으니 마스터 승리!"  라는 것은 절대 아니고;  다만, RPG라는 것은 결국은 마스터가 마련해 놓은 '틀'에 대해 플레이어들의 '불규칙성'이 부딪히는 대결의 장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밑에서부터는 순전한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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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했듯, RPG는 마스터가 마련해 놓은 시간/장소/사건에 플레이어가 참석, (결과적으로)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RPG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갈등'입니다(유토피아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 질 수 없겠죠?).  일반적으로, 마스터가 만들어 놓은 "갈등의 불씨"를 플레이어가 촉발시키면서 대립은 시작됩니다.

한 세션 안에서, 마스터는 갈등에 관련된 어떠한 상황을 가정해서 세션 내의 요소들 간의 인과관계, 즉 일정한 플롯을 만들어 놓습니다 . ("PC가 화장실에서 빨간 휴지를 선택하면 빨간 괴물이 오고, 파란 휴지를 선택하면 파란 괴물이 온다.").  마스터의 계획 내에서, 이러한 플롯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질서있게 작동합니다.  그러나 타자, 즉 플레이어들이라는 외부 침입자들과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마스터의 플롯은 본격적으로 도전받기 시작합니다.  ("마스터!  비데를 구입하겠습니다."  "그, 그래?")  PC들은 결코 작가가 만든 소설/영화 속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이들은 엄연히 플레이어들에 의해 조종되는 '독립된 인격'이며, 실제 상황의 커뮤니케이션이 그렇듯, 그 진행과정과 결과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는 역동적인 존재입니다.

마스터의 목적은 PC를 통제, 자신의 플롯 속에 다시 편입시켜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든, 혹은 인과관계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것이든 큰 의미는 없습니다.  단지 마스터가 애초에 만들었던 플롯 안에서 '예측대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마스터는 PC를 통제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플레이어의 목적은 자신의 PC를 통해 충분히 롤플레이를 하면서 세션에서 드러난, 혹은 자기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반드시 결과가 꼭 '플레이 내에서 성공적인 결과'일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자기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납득이 가는 결과이기만 한다면 충분합니다.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대결은 '룰'과 '당위성'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펼쳐집니다.  룰의 경우, "빵야!  빵야!  넌 죽었어!"  "아냐!  난 피했어!" 와 같은 상황.  즉, 배경 세계 내에서의 행위의 성공/실패 여부를 판정할 때 사용됩니다.  합리성은 배경 세계와 상식의 당위성.  즉,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법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들었던 빨간 휴지와 파란 휴지 선택 문제에 대해 따져 봅시다.

마스터 : "공휴일이라 가게가 문을 닫았군요.  비데 구입은 못하겠어요."   (당위성)
플레이어 : "그래요?  그럼 옆 건물에 가서 화장실을 이용하지요.  사실 저 휴지는 기분이 나쁘거든요.  쓰고 싶지 않아요."  (당위성)
마스터 : "그렇군요.  옆 건물에 가니, 낯선 사람을 보고 경비원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한 번 반응 판정 해 보겠어요?"  (룰+합리성)
....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이 두가지 수단을 통해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며 대립합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결코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마스터가 플레이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무시한채 자신의 플롯만을 강제하려 한다면 시시한 철로형(Railroad) 시나리오 밖에 될 수 없으며, 플레이어가 마스터가 만든 플롯을 무시한 채 혼란만을 가중시키려 한다면 세션 자체가 아예 중단될 것입니다. 따라서, 둘 간의 관계는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검투가 아닌, 서로의 기량을 과시하면서도 상대방과 조화를 이루고 마침내 한 폭의 그림을 만드는 검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방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요?  그건 역설적으로 상대를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우선, 마스터는 플레이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나오는 새로운 정보들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플롯 안에 수용시키고, 기존의 플롯을 수정/변경/추가/대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들이 기어이 비데를 찾는데 성공한 경우, "예.  여러분은 두 개의 비데를 찾았습니다.  연분홍색 비데와 군청색 비데군요." 와 같은 방법으로 얼마든지 변형을 할 수 있는것 입니다.  플레이어 역시 마스터가 "이걸 사용해봐!" 라고 무언으로 외치면서 보여주는 플롯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이야기거리와 행동소재를 더욱 늘리는 센스를 갖춰야 하겠죠?  

이와 같이 마스터/플레이어가 대립하고 한계를 시험하면서 서로의 기량을 늘리고, 역설적으로 "결국에는 서로 상생해야 한다"라는 마음가짐을 잊지 않을 때, 비로소 RPG의 재미라는 것이 성립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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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준비 할 때가 되니 왠지 이런 긴 글을 쓰고 싶어지더군요.


by Wishsong | 2007/04/13 02:08 | RPG | 트랙백(1)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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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로키의 로카세나 at 2007/04/18 10:24

제목 : RPG, 혹은 역동적 긴장
Wishsong님의 글과 그에 대한 성일님의 댓글을 보고 떠오른 생각들입니다. 트랙백 주거니 받거니, 그 두번째! (..)RPG의 게임성을 다룰 때도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규칙을 매개로 해서 밀고 당기는 활동에서 나오는 역동적 긴장은 RPG의 재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역동적 긴장의 내용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크게 다음 세가지입니다.1. 진행 방식에 대한 긴장링크한 Wishsong님의 글에서 볼 수 있는 예입니다......more

Commented by leinon at 2007/04/13 08:54
교육학에서의 기능론/갈등론 대립과 비슷하군요
Commented by 로키 at 2007/04/13 10:35
RPG란 어떻게 보면 하나의 파괴적 창조의 과정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한편으로는 진행자가 만들어 놓은 상황에 참가자가 들어와서 변화를 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가자가 만들고 연기하는 인물이 진행자가 제시하는 상황에 의해 변화하고, 그러면서 서로 충돌하고 소통하고...

자기 방향으로 계속 이끌어 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는 면에서는 막무가내로 당기는 줄다리기가 아닌 무용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쪽이 원래 생각한 방향과도 다르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타협도 아닌,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역동적인 긴장이랄까요.
Commented by Wishsong at 2007/04/13 19:42
leinon / 교육학을 배우지 못해서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군요;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로키 / 심하게 말해서, RPG에서 항상 하하호호 하면서 끝나기만 하면 소꿉놀이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생각을 들이대면서 충돌하는 맛이 있어야 세션을 할 맛이 나요;;;
Commented by Realkai at 2007/04/14 01:10
원래 Alternative한 맛이 없으면 RPG가 아니죠.
Commented by Asdee at 2007/04/14 02:27
음... 마스터가 특별히 "결말"을 생각해두지 않은, 열린 플롯이라면 좀더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으려나요?
Commented by 로키 at 2007/04/14 05:00
Wishsong// 예, 그렇게 노는 것도 가끔 재미있긴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플레이'라는 느낌은 안 들어요. 그냥 말씀하신대로 '소꿉놀이'라는 생각 뿐... 바로 그 소꿉놀이의 한계가 일본 RPG 시장의 실패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문제의 중요성이 더욱 와닿는 것 같습니다.

Asdee// 제 경험으로는 개방형 진행도 같은 맥락인듯 합니다. 어떻게 보면 개방형 진행에서 이런 역동적 긴장이 더 순수한 형태로 드러나는 게, 진행자는 참가자들에 의해 변해갈 초기 상황을 상정하고 인물들을 연기하기 때문에 그 인물들의 입장이 되어 참가자들이 가져오는 변화에 저항해야 하거든요. (혹은 어떤 변화를 막으려는 참가자들에게 저항하거나.) 개방형 진행의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이런 모습이 나타날지 생각해 봐야겠군요.
Commented by 김성일 at 2007/04/16 10:34
세션에도 답글을 달았지만 좀 다른 각도로 얘기를 하자면 ^^

요즘 저희 팀의 플레이는 완전히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누구 하나도 원치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모두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타협도 있고 양보도 있고 신뢰도 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안 해본 사람은 아마도 모를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입니다.

근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하다 보니까 새로운 "적"이 보이더라는 겁니다. 다름 아닌 플레이 그 자체, 또는 플레이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겁니다. 한때는 완전히 마스터 손에만 있었던 "권력"인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권력이 마스터 손에 있었다기 보다는 마스터가 통제에 눈이 멀어서 권력에게 잡혀 먹혔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힘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튼 이 흐름-권력이 "제멋대로" 플레이의 방향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다스리는 것이 플레이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별도의 글로 정리하는 중인데... 여하튼 그래서 요즘에는 플레이라는 이름의 괴물과 싸우면서 플레이를 하고 있습니다. 협력과 합의에 의한 플레이에는 다른 레벨에서의 싸움이 따릅니다... 그게 "소꿉놀이"라면 소꿉놀이는 그야말로 스릴이 넘치는 대모험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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