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로키님이나 CBM님, 천승민님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은, '역시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서로 대립해야 하는 관계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최종보스를 죽였으니 플레이어 승리!" "마스터의 손바닥에서 플레이어가 놀아났으니 마스터 승리!" 라는 것은 절대 아니고; 다만, RPG라는 것은 결국은 마스터가 마련해 놓은 '틀'에 대해 플레이어들의 '불규칙성'이 부딪히는 대결의 장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밑에서부터는 순전한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 위에서 말했듯, RPG는 마스터가 마련해 놓은 시간/장소/사건에 플레이어가 참석, (결과적으로)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RPG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갈등'입니다(유토피아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 질 수 없겠죠?). 일반적으로, 마스터가 만들어 놓은 "갈등의 불씨"를 플레이어가 촉발시키면서 대립은 시작됩니다. 한 세션 안에서, 마스터는 갈등에 관련된 어떠한 상황을 가정해서 세션 내의 요소들 간의 인과관계, 즉 일정한 플롯을 만들어 놓습니다 . ("PC가 화장실에서 빨간 휴지를 선택하면 빨간 괴물이 오고, 파란 휴지를 선택하면 파란 괴물이 온다."). 마스터의 계획 내에서, 이러한 플롯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질서있게 작동합니다. 그러나 타자, 즉 플레이어들이라는 외부 침입자들과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마스터의 플롯은 본격적으로 도전받기 시작합니다. ("마스터! 비데를 구입하겠습니다." "그, 그래?") PC들은 결코 작가가 만든 소설/영화 속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이들은 엄연히 플레이어들에 의해 조종되는 '독립된 인격'이며, 실제 상황의 커뮤니케이션이 그렇듯, 그 진행과정과 결과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는 역동적인 존재입니다. 마스터의 목적은 PC를 통제, 자신의 플롯 속에 다시 편입시켜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든, 혹은 인과관계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것이든 큰 의미는 없습니다. 단지 마스터가 애초에 만들었던 플롯 안에서 '예측대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마스터는 PC를 통제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플레이어의 목적은 자신의 PC를 통해 충분히 롤플레이를 하면서 세션에서 드러난, 혹은 자기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반드시 결과가 꼭 '플레이 내에서 성공적인 결과'일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자기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납득이 가는 결과이기만 한다면 충분합니다.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대결은 '룰'과 '당위성'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펼쳐집니다. 룰의 경우, "빵야! 빵야! 넌 죽었어!" "아냐! 난 피했어!" 와 같은 상황. 즉, 배경 세계 내에서의 행위의 성공/실패 여부를 판정할 때 사용됩니다. 합리성은 배경 세계와 상식의 당위성. 즉,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법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들었던 빨간 휴지와 파란 휴지 선택 문제에 대해 따져 봅시다. 마스터 : "공휴일이라 가게가 문을 닫았군요. 비데 구입은 못하겠어요." (당위성) 플레이어 : "그래요? 그럼 옆 건물에 가서 화장실을 이용하지요. 사실 저 휴지는 기분이 나쁘거든요. 쓰고 싶지 않아요." (당위성) 마스터 : "그렇군요. 옆 건물에 가니, 낯선 사람을 보고 경비원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한 번 반응 판정 해 보겠어요?" (룰+합리성) ....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이 두가지 수단을 통해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며 대립합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결코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마스터가 플레이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무시한채 자신의 플롯만을 강제하려 한다면 시시한 철로형(Railroad) 시나리오 밖에 될 수 없으며, 플레이어가 마스터가 만든 플롯을 무시한 채 혼란만을 가중시키려 한다면 세션 자체가 아예 중단될 것입니다. 따라서, 둘 간의 관계는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검투가 아닌, 서로의 기량을 과시하면서도 상대방과 조화를 이루고 마침내 한 폭의 그림을 만드는 검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방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요? 그건 역설적으로 상대를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우선, 마스터는 플레이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나오는 새로운 정보들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플롯 안에 수용시키고, 기존의 플롯을 수정/변경/추가/대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들이 기어이 비데를 찾는데 성공한 경우, "예. 여러분은 두 개의 비데를 찾았습니다. 연분홍색 비데와 군청색 비데군요." 와 같은 방법으로 얼마든지 변형을 할 수 있는것 입니다. 플레이어 역시 마스터가 "이걸 사용해봐!" 라고 무언으로 외치면서 보여주는 플롯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이야기거리와 행동소재를 더욱 늘리는 센스를 갖춰야 하겠죠? 이와 같이 마스터/플레이어가 대립하고 한계를 시험하면서 서로의 기량을 늘리고, 역설적으로 "결국에는 서로 상생해야 한다"라는 마음가짐을 잊지 않을 때, 비로소 RPG의 재미라는 것이 성립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면접 준비 할 때가 되니 왠지 이런 긴 글을 쓰고 싶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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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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