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을 마치고.

1.
모두들 이번 장례식을 호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든 일곱 살까지 정정하게 생활하셨고, 몸이 아프셨던 날짜 또한 그다지 길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아쉬움은 많이 남습니다.  몇 달 전에 골절상을 입고 몸이 쇠약해지시만 않으셨더라도 몇 년은 더 계셨을 수도 있었을거라는 생각부터, 게으름 때문에 주말에 할아버지 문병 가는 걸 차일피일 미뤘던 것,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잘 계셨을 시절에 이천 집에 좀 더 많이 찾아 뵈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후회 등은 가슴 한 켠에 남아있습니다.  이런 게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것이겠지요.  남아 계신 할머니께는 좀 더 신경을 많이 써야겠습니다.

2.
이번 장례식을 치르면서 하나 더 느낀 것은 할아버지가 자식 농사는 참 잘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산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고, 더욱이 아버지나 숙부님들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서 부유하게 살아가시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장례식에는 참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친척들은 차치하더라도 숙부님들 친구들과 직장 동료, 선후배들이 많이 오셔서 문상을 해 주셨습니다.  그만큼 숙부님들이 많이 인덕을 쌓으셨다는 거겠죠.  한 가지 기분좋은 고민은 이번에 부의금이 많이 걷혀서 장례식 비용+염 비용+화장 비용+할아버지 병원비까지 모두 해결하고도 돈이 많이 남아서 어떻게 처리할지 가족들이 고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할머니 생활비로 쓰든지, 아버지가 맡으셔서 돈을 관리하게 되겠죠. 

3.
가족 분들이 모두 화목한 모습을 보인 것 역시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분쟁거리가 될 만한 유산 같은 것이 애초부터 없기도 했지만(...) 지난 몇 달간 할아버지를 간호하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보여준 모습이라든지, 할아버지 사후 할머니를 모시기 위한 가족회의에서 무난하게 논의가 이루어진 모습 등은 참 보기가 좋았습니다.  물론 장례식장에서도 모두들 자신의 일을 맡아서 최선을 다했죠.  장손인 주제에 제가 가장 게으름을 많이 피운 것 같습니다;
오랫만에 고모네 가족을 볼 수 있었던 것도 기뻤습니다.  대학교 입학 이후 고모를 거의 뵙지 못했는데, 이번 장례식을 통해 다시 가까워질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4. 
하지만 장례식은 결국 슬픈 일입니다.   
장례식 이틀째 아침에 염을 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보람상조에서 오신 분들이 "저희 부모님을 모시는 것처럼 염을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다음 염을 시작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얼굴에 흰 천을 덮으신 채 조용히 누워계셨습니다.  상조분들이 몸을 수건으로 닦으신 다음, 손과 발부터 차례차례 수의를 입히셨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물건에 포장지를 싸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알고 있었습니다.  뻣뻣하게 굳은 시신에 옷을 입히기 위해서는 저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하지만 서글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몸을 결박하기 시작할 때, 사촌동생이 구토를 하면서 쓰러졌습니다.  차마 그 모습을 더 볼 수 없었던 것이겠죠.
얼굴에 수의를 씌우기 전, 마지막으로 가까이에서 할아버지를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냉동실에서 하루를 보내신 할아버지의 얼굴은 무척 낯설었습니다.  입 안에는 부패를 막기 위한 것인지 흰색의 젤리 비슷한 것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무척 차갑고 딱딱했습니다.  사후 직후의 모습은 무척 편안하셨다는데...
장례식 마지막 날, 화장은 대전 화장터에서 했습니다.  막내숙부님의 교회에서 오신 분들이 "요단강 건너 만나리"를 부르는 가운데 할아버지를 모신 관이 천천히 화장 기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음보다도 몸이 먼저 반응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때 알았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왈칵 터졌습니다.  그 다음에서야 슬픔을 느낄 수 있더군요.  화장이 끝난 후 아버지는 "화장하는 장면을 직접 유족들한테 보여주면 어떻게 하느냐." 라면서 투덜거리셨지만, 저는 반대로 느꼈습니다.  화장하는 장면을 직접 봤기 때문에, 오히려 할아버지를 더욱 추도할 수 있었다고.

5.
할아버지의 유골은 대전시 시립납골당에 모셨습니다.  산으로 둘러쌓인 평화롭고 조용한 장소였습니다.  가족들은 "이런 곳에서 잠들 수 있는 것도 할아버지의 복이다" 라고 말하면서 만족했고, 특히 누나는 흰나비를 보았다면서 기뻐했습니다.  화환과 할아버지 사진으로 유골함이 들어있는 선반을 꾸미고, 기도를 드린 다음 내려왔습니다.

6.
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야 말로 진짜 어른이 되고, 늙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저는 살아오면서 계속 무언가를 얻기만 했습니다.  물론 잃는 것도 있었지만(연락을 안해서 멀어진 친구라든지, 뽀송뽀송한 어릴 적 피부라든지...) 보통 이런 것들은 제 선택의 결과라든지, 성장하면서 변화하는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언가를 영구히 잃기 시작하는 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등산으로 비유하자면 인생이라는 삶의 봉우리를 내려오기 시작한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할머니, 부모님, 친척분들, 기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차례차례 세상을 떠날 것이고, 언젠가는 제 차례도 오겠죠.  이제서야 자신이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를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7.
무엇보다도 장례식에 찾아오신 분들과 온라인 상으로 격려해주신 분들께 가장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장례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도와주신 보람상조 여러분께도 감사를.  비록 "용역대가"를 받고 도와주신 것이지만, 상조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장례식을 별 탈 없이 치른것 같습니다.
장례식을 같이 치른 가족친척분들께는 감사의 마음과 동시에 부끄러운 마음도 듭니다.  장손인 주제에 가장 늦게 가서 첫째날 고생을 다른 분들께 모두 떠넘긴 것, 정말 죄송합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에 함께 해 주신 교회 분들께도 역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비록 할아버지는 정교회 신자이지만, 여러분 기도 덕분에 주님께서 기쁘게 할아버지를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할머니, 오래오래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자주 전화드리고 가끔 찾아가뵐께요.
그리고 할아버지, 편히 잠드세요.  언젠가 다시 뵙기를.

 

by Wishsong | 2008/06/12 11:19 | 나와 주변의 일.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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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아브공군 at 2008/06/12 11:31
수고 많으셨습니다.
Commented by Wishsong at 2008/06/13 12:48
고맙습니다. :)
Commented by 마삭희 at 2008/06/12 15:24
수고하셨습니다.
Commented by Wishsong at 2008/06/13 12:49
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
Commented by lhovamp at 2008/06/12 19:29
고생하셨음. 한동안은, 푹 쉬길.
Commented by Wishsong at 2008/06/13 12:49
이번 주까지는 머리를 식혀야지.
Commented by Realkai at 2008/06/12 23:25
그나마 다행이네요.

저희 집은 큰아버지와 저희 아버지 대립이 심해서 장례식때까지도 전혀 편하지 못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후...
Commented by Wishsong at 2008/06/13 12:50
다행히 숙부님들이 아버지(장남) 말씀을 잘 따라줘서 별 탈없이 마친 것 같아요.
Commented by Xenosia at 2008/06/13 09:35
장손이셨군요
아 찔린다 [..]
Commented by Wishsong at 2008/06/13 12:50
제노시아님도 장손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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