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술권 분배와 RPG 규칙
로키님의 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전통적인 진행자 / 참가자 구분에서는 참가자들의 다양한 이야기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각 RPG 시스템들에서는 이러한 서술권 욕구 해소를 위해 어떠한 방법이 마련되었을까요?



1. 복수 캐릭터 / 복수 마스터 –아르스 마기카/ 레이스 : 디 오블리비언

어떤 시스템들은 참가자들에게 다중의 역할을 부여하여 더욱 다양한 유형의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권장합니다.

레이스 : 디 오블리비언(Wraith : The Oblivion)에서는 특정 PC를 맡은 플레이어의 옆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가 그 PC의 어두운 내면이 되어 PC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허무로 점차 끌려들어가는 망령들의 내적 투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 레이스 : 디 오블리비언의 암울하고도 독특한 분위기를 돋보이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아르스 마기카(Ars Magica)는 여기에서 더 한 발 나아가 “Troupe System”이라 하여 한 명의 플레이어가 마법사 / 마법사의 동료 / 마법사의 부하 등 다수의 인물을 플레이 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중심이 마법사 A라고 한다면 마법사 B와 C의 플레이어는 그 세션에서는 마법사 A의 주변인물로 플레이하는 형식처럼 말이죠. 참가자들은 이를 통해 기존 RPG의 ‘파티 모험물’뿐만이 아니라 마법사의 일상과 연구활동 등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등을 연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르스 마기카에서는 한명의 참가자가 마스터를 맡는 전통적인 RPG와는 달리, 모든 플레이어가 돌아가면서 마스터링을 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명의 참가자가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총괄하는 “알파”마스터가 된다면, 다른 참가자들은 “부르간디 공”“요정”등의 캠페인 내 특정 분야에 대해 책임을 맡아 그에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 마스터링을 실시하는 “베타”마스터가 되어 각자 시나리오를 만들어 참가하는 형식으로 말이죠.



2. 장면 서술권 및 장면 신청 – 던전/ 세기의 혼/ 안방극장 대모험….

어떤 시스템들은 플레이 내에서 이야기의 서술권 자체를 플레이어들에게 일정부분 맡기는 방식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던전(Donjon)의 경우는 플레이 내에서 모든 참가자들에게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서술권을 제공합니다. 던전에서는 PC들의 행동에 대한 판정시("저는 저 절벽을 뛰어넘겠어요!") 에 마스터와 플레이어 간 겨루기 굴림을 하여 승리한 쪽은 성공수 차이 당 1개씩의 "현상(Fact)"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실패했군요. PC는 절벽에서 추락했습니다. 추락한 자리에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해골들이 괴이한 신음을 토하며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실패한 쪽은 그 현상에 대해 서술합니다. ("그 해골들이 말하네요. '우리는 10년 전 이 동굴에 왔다가 추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 ) 모든 참가자들은 성공 / 실패에 관계없이 어떠한 사실을 만들어내든지, 혹은 그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디테일을 제공함으로써 이야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세기의 혼(Spirit of the Century)도 각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각종 면모를 이용하여 참가자들이 원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 규칙이 있던 걸로 아는데,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안방극장 대모험(Primetime Adventure)은 장면 내 현상에 대한 서술뿐만이 아니라 아예 참가자들이 돌아가면서 장면 그 자체를 만들어 나갑니다. ("이번 장면에서는 사교 컬트가 마을 아이들을 납치하는 걸로 해 보죠.") 모든 참가자들은 돌아가면서 한 장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장소 / 구체적 사건의 모습 / 목적 을 만들고, 마스터는 이를 묘사하고 진행합니다. 판정에 있어서도 참가자들은 "내가 이기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 전반에 걸쳐 기존 RPG보다 더욱 넓은 서술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3. 마스터를 죽이고 물품을 강탈해라! - 쇼크 / 폴라리스 / 도전자 / 미딕…

모든 참가자들의 서술권을 강화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역시 마스터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규칙일 것입니다. 특히 인디 RPG에서는 위에서 말한 2번이나 3번과 같은 방법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쇼크(Shock)나 폴라리스(Polaris), 도전자(Contender) 등은 각 장면마다 “주인공”이 정해지고(보통은 시계 방향 /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그 주인공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적수”참가자가 일시적으로 마스터의 역할을 맡아서 주인공에게 도전과제를 부여합니다. 다른 참가자들은 그 주인공의 주변인물(“이 장면에서 내가 주인공의 동생 역할을 맡겠어.”, 혹은 배경 세계의 특정 부분(“이 세계에서 사신은 달이 없는 밤에만 소환할 수 있어. 그렇게 알고 진행해줘.”)을 담당하여 적수 참가자의 (일시적) 마스터링을 도와줍니다. 이러한 방식들은 기존의 주류 RPG에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던 서술권 관련 규칙을 강화하여 각 참가자들에게 커다란 서술권을 부여한 반면에,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 자체를 특정한 분야(폴라리스 – 비극, 쇼크 – 사회/개인 간의 갈등, 도전자 – 고통과 희망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개인의 투쟁)에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전에 로키님이 다&챗에 번역하신 “그레그 포터의 RPG 세대론(로그인 필요)"이라는 글을 보면 각 시스템의 진화상에 따라 세대가 나뉘어지는데, 이러한 RPG들은 4세대 후기에 속하지 않나 싶습니다. )

‘마스터 죽이기’의 또 다른 방법으로는 마스터를 없애는 대신 그 자리를 플레이어들의 합의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는 RPG로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미딕(Mythic)이 유일한데, 미딕은 GM 애뮬레이션(GM Emulation)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이용하여 마스터의 빈 자리를 대체합니다. 예를 들어, PC들이 “파발꾼이 도착했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 기존 RPG에서는 마스터가“예/아니오”를 대답합니다. 미딕에서는 표에 따라 그 확률을 PC가 결정하고(“그 파발꾼은 발이 빠르니까, 아마도 도착했을 거야.”) “예/아니오” 를 표에 따라 굴리고 결과를 봅니다. 또 다른 예로 PC들이 “그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을 때 기존 RPG에서는 마스터가 사전에 만들어둔(혹은 마스터가 즉석으로 생각해 둔) 설정을 이야기해주지만, 미딕에서는 주어 / 동사 표를 보고 주사위를 굴려서 “죽음” “습격하다” 과 같은 결과를 얻은 후, PC들이 “음. 치명적인 역병이 마을을 덮쳤다고 보는 게 어떨까?”라고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GM 애뮬레이터 방식은 플레이어들의 창의력과 능동성에 따라 이야기가 천차만별로 달라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제시한 1~3번 방식은 반드시 특정 규칙에서만 가능한 것만은 아니며, 참가자들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습니다.. 기존 RPG에서 한 참가자가 다수의 PC를 맡는 방식은 이미 여러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며, 마스터링을 돌아가면서 하는 것 역시 아주 특이한 것은 아닙니다. 김성일님이 세션에서 제시하신 ‘합의적 플레이’ 역시, 기존의 전통적 RPG에서 부족하기 쉬운 플레이어들의 서술권을 더욱 보장하기 위하여 2번과 3번 방식을 혼용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는 이전에 안방극장 대모험을 마스터 없이 플레이해 보았는데, 나름 성공적으로 플레이를 마쳤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http://wishsong.egloos.com/3702682 참조)
by Wishsong | 2008/09/04 13:27 | RPG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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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아브공군 at 2008/09/04 13:36
안방극장 만만세!
Commented by Wishsong at 2008/09/04 20:38
안방극장은 명작 RPG 중에 하나죠. :)
Commented by 로키 at 2008/09/05 00:20
합의 플레이는 서술권을 합의를 통해 행사하자는 합의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서술권의 분배를 바꾸는 건 아니라고 봐. 그 한계는 이번에 길드타운 플레이에서 꽤 느꼈지. 무엇보다 합의가 잘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막막.

레이쓰는 폴라리스하고 비슷한 면이 있는 게, 주인공과 적수의 서술권을 분리해서 적대관계를 유도하고 파국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는 점이지. 그게 승한군이 트랙백 건 내 원래 글에서 얘기하고 있었던 효과기도 해. 서술권이 다른 영역끼리는 적대하기가 가장 쉽다는 거. 그 효과를 잘 이용한 예가 레이쓰와 폴라리스라고 봐.

세기의 혼의 면모 발동 규칙과 안방극장의 장면 신청 규칙은 이전에 성일님과 토론하면서 얘기했던 소극적 합의 개념이기도 하지. 면모 발동도, 장면 신청도 최종 판단 내지 구체적 표현은 진행자 몫이지만, 참가자에게 규칙상 보장되어 있어서 진행자가 거부하려면 정당화를 해야 하니까. 그런 면에서 참가자 발언이 받아들여지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리지.

미딕은.. 전에 승한군하고 해봤지만, GM 에뮬레이터는 역시 좀 느린 기분이었어. 그래서 결국 돌아가면서 진행하고 다른 쪽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방식이 됐던가. 그때 서사적 규칙과 묘사적 규칙의 차이를 얘기하기도 했고, 재밌는 시도였지.
Commented by Wishsong at 2008/09/08 13:13
합의 플레이의 단점(?)은 역시 규칙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포괄적 '기법'이라는 점에서 합의가 잘 안될 때 해결하는 방안이 막막한 것 같아.

미딕 같은 경우는 무척 재미있게 했었는데, 나중에도 같이 해 보고 싶어 :)
Commented by myst at 2008/09/05 19:05
요새 마스터의 부담이 없는 RPG를 추구하고 있는데
어떤 시스템이 알맞은지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폴라리스나 쇼크가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요? 미딕은 또 어떨런지 궁금하네요.
Commented by Wishsong at 2008/09/08 13:16
마스터의 부담이 없는 RPG라면 인디 쪽을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폴라리스나 쇼크, 둘 다 추천할만 합니다. (마스터가 아예 없으니까요) 전통적인 RPG 형태에 가까우면서도 부담이 비교적 덜한 것을 원하신다면 '포도원의 개' 정도가 생각이 나네요.

미딕의 경우는, 로키님이나 불타는도넛 님이 이야기하신 것 처럼 미딕을 곧이 곧대로 마스터 없이 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려요. 일단 한 명이 진행을 하고, 표의 굴림에 대해서는 플레이어 측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다면 확실히 좀 더 빠르게 돌아갑니다.
Commented by 불타는도넛 at 2008/09/06 20:36
myst님// 미식은 랜덤하게 나온 데이터들을 '플레이어들의 합의로' 해석하며 진행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요, 예상할수 있듯이 시간이 '성가실 정도로' 오래 걸립니다. 제가 추천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통적인 플레이 방식대로 한명의 마스터와 플레이어들로 구성된 팀을 조직하고 이야기 진행은 '미식'에 맡길수도 있죠(룰북 7페이지에서 One GM, any number of players라는 제목으로 소개하는 방식입니다). '플레이어들의 합의'를 생략하고 빠른 진행을 할수 있고, 마스터는 '시나리오 준비를 하지 않아도' 플레이가 꽤 그럴싸하게 돌아 갑니다.
Commented by 불타는도넛 at 2008/09/06 20:37
그건 그렇고 '쉽고 부담없는 RPG'는 시대의 추세인듯.
Commented by Wishsong at 2008/09/08 13:17
다만, 주류 RPG 쪽은 (이번에 D&D 4th에서 나타나는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그런 '부담없는RPG'를 추구하는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아서 좀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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