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 4th의 디지털화에 대한 생각.
1. D&D 4th와 그 이전 버전과의 차이.

많은 사람들이 D&D 4th에 대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D&D 4th는 슈퍼로봇대전이다"  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제각기 개성과 능력이 뚜렷한 주인공들이 배틀맵 위에서 적들과 전술적 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더도 덜도 아닌 전형적인 SRPG 게임이지요.

~ AD&D = 아날로그 > 디지털, Art > Science
D&D 3.X = 과도기.
D&D 4th = 디지털 > 아날로그, Science > Art

단순히 배틀맵, 미니어처, 수치를 이용한 전투 때문에 컴퓨터 게임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AD&D 시절에는  "(전사, 도적, 성직자, 마법사)라는 컨셉을 어떻게 수치로 표현하는가?"  라는 방식으로 룰을 만들었다면,  D&D 4th는 "이 수치를 어떻게 (전사, 도적, 성직자, 마법사)라는 컨셉으로 표현하는가?"  라는 방식으로 룰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이 두 방식의 차이를 보자면 전자의 경우는 "우선 이 (아날로그적인) 특성을 나타내자.  어떻게 하면 이 컨셉을 유지한 채 (디지털적인) 게임이 가능하도록 디자인하는가?" 였다면 후자의 경우는 "우선 (디지털적인) 게임의 수치를 만들자.  어떻게 하면 이 수치간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은 채 각각의 데이터가 (아날로그적인) 특색이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즉, D&D 4th는 규격화되고 세분화된 규칙을 만들어, 이 것을 예외없이 시스템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시키는 모듈화 방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D&D 4th를 "디지털"스럽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D&D 3.x는 D&D가 아날로그->디지털적으로 변모해간 과도기라고 생각합니다.) 

D&D 4th를 꺼려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D&D 4th는 클레스간 밸런스가 맞춰진 대신 개성이 없다."  "그냥 워게임을 하는 것 같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점이 바로 위에서 말한 게임 제작 방식의 차이로 인해 나타난 현상("지나치게 디지털화가 되어버린")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수치로 표현하기 힘든 마법 주문에서 D&D 4th와 그 이전 버전의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데, "무조건 명중하는" 매직 미사일, "무조건 공격을 막는" 포스 월,  "확실히 명중굴림을 보장하는" 트루 스트라이크 등이 D&D 4th에서 약화되거나 사라진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문들은 마법사가 쓰는 주문의 컨셉으로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걸 실제 수치로 나타냈을 때는 밸런스 측면에서 곤란해집니다.  D&D 4th의 철학은 "모두가 전투에서 객관적으로 동등한 수준의 활약을 하고 재미를 느끼게 하자" 입니다.  D&D 4th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혹평을 받은 것 중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스킬 챌린지라는 사실은 비전투 도전을 전투만큼 충분하게 규격화, 디지털화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것에 대한 실망감의 표출이라고 생각합니다. 



2. 슈로대의 보드게임 버전이 아닌, D&D 4th를 즐기기 

앞으로 D&D의 디지털화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1월 업데이트 대란(...)에서 보았듯 D&D의 업데이트는 이제는 단순히 잘못된 글을 수정하는 '에라타'뿐만이 아닌, MMORPG와 마찬가지로 점점 더 확장되는 자료 속에서 나타나는 밸런스 문제를 조종하는 '패치'가 되었습니다.  과거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캐릭터 빌더는 D&D 4th 시절이 된 후 반필수적인 액세서리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퀵 캐릭터 메이킹 버튼을 눌러서 10초만에 캐릭터를 만들어도 큰 문제 없이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물론 효율성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만큼 '컴퓨터 게임화'되어가고 '몰개성화' 되어가는 D&D 4th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첫번째, 당신의 캐릭터는 (HP 29  Attack +8  AC 17  Fortitude 15  Reflex 12  Will 15 1lv Dragonborn Warlord ) 뿐만이 아닌  "용맹한 워로드이자 긍지높은 용족의 후예인 아무개"이기도 합니다.  롤플레잉하십시오.  당신의 캐릭터를 어필하십시오.  적절한 롤플레잉은 그 캐릭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어떤 경우에는 기술 판정에 +2를 주기도 합니다.  물론 "나는 겁쟁이니까 도망치겠어!" "나의 연설은 그들을 감동시켜...(10분 이어짐)"를 권장하는 게 아닙니다.  적절한 롤플레잉과 민폐 롤플레잉의 차이는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두번째, 마찬가지로 몬스터 역시 전투에 최적화된 인공지능 AI가 아닌, "드워프를 증오하는 오크"  "마법을 증오하는 광신자" 이기도 합니다.  반드시 PC에게 최대의 피해를 주기 위해서만 행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PC 중 하나가 악당들을 배반하고 선의 편으로 돌아선 영웅일 경우 "저놈 만큼은 어떻게든 죽여라!" 라는 지시에 따라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적들끼리 서로 경쟁하는 경우 전투중 PC의 손을 빌려 경쟁자를 죽인다는 차도지계를 쓸 수도 있습니다.   또는 하플링의 고기를 너무나 좋아해서 앞뒤 안가리고 하플링 로그에게 무작정 돌진할 수도 있습니다.  적들 역시 제각기 싸울 동기를 가지고 활동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번째, 이동-공격만이 전투의 전부는 아닙니다.  치열한 전투 중 불타는 저편 방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강을 건너오는 적의 무리를 일일이 맞서 싸우는 것보다 강 상류의 둑을 터뜨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드라마틱할 때도 있습니다.  마스터는 서브 퀘스트 XP 떡밥이나 지형의 변화를 통해 테마와 드라마가 있는 전투를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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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정도가 현재까지 D&D4th를 마스터링하고 든 생각입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디지털 자료를 아날로그 감성을 이용해 즐기는 디지로그 RPG'를 하자는 것이고;  간단히 말하자면 규칙이 담당하고 있지 않는 부분을 롤플레잉과 상식에 따라 꾸미자, 라는 것입니다.

※ '컨셉과 데이터적 강함의 사이'에 대해서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솔직히 데이터적 강함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고, D&D 4th의 룰적 밸런스는 기형적으로 캐릭터를 만들지 않는 한 무난히 플레이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 스킬 챌린지의 경우는 지금보다 오히려 정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투와 다르게 그 범위가 훨씬 포괄적이고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던전탐험' '야외탐험'  '논쟁' '전쟁터' 등 큰 카테고리를 만들어 어느 정도는 규격화할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D20 시스템인 첩보물 RPG인 Spycraft 2nd의 경우 '추격전' '세뇌' '잠입' '설득' '미행' 등 첩보물에서 흔히 볼수 있는 장면들에 대해 '드라마틱 컨플릭트 Dramatic Conflict'라는 비전투 대결 규칙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D&D 4th의 경우도 이러한 방법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D&D Insider에서 마이크 멀즈 씨가 연재하고 있는 스킬 챌린지 강좌가 그러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by Wishsong | 2009/11/30 12:55 | RPG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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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DH at 2009/11/30 15:25
'규칙이 담당하고 있지 않는 부분을 롤플레잉과 상식에 따라 꾸미자'
는 어떤 rpg를 해도 명심해야 할 것 같스니다. 플레이어들의 욕구를 룰북에서만 찾아서 메꾸려고하니 한계가 오더군요. 이래서 마스터의 상식과 다양한 경험이 중요한 것 같은데 부족한 인간이다보니 ㅠㅠ
Commented by Wishsong at 2009/11/30 15:38
하다보면, 그리고 이것저것 경험해보면 자연스럽게 마스터링 실력도 는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최원 at 2009/12/01 12:16
구조적으로 굉장히 잘 정리해주셔서 읽다보니 아~하고 개념적으로 정리가 잘되네요. 흐흐

스킬 첼린지 같은 경우는 제작자에서도 완벽히 개념정립을 하지 못한 규칙 같습니다. 사실 DMG 에라타로 스킬첼린지에서 우선권 굴림이 삭제된 것만 봐도 위자드가 이 규칙을 제대로 테스트하여 정교하게 뽑아낸 것이 아니라는게 느껴지죠.(한번만 스킬첼린지를 돌려봐도 스킬첼린지용 우선권이 따로 있어선 안된다는게 느껴지잖아요;) 아무튼 룰 자체의 지향점은 확~ 끌리지만 지금정도의 룰로는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결국엔 참가자와 진행자의 역량에 좌지우지된달까, 썰렁해지기 쉽상인거 같아요.

4판 규칙을 처음 접했을때는 전시리즈중에서 가장 DM에게 편리한 게임, 심플+컴팩트+컴비넌트~라고 생각했지만, 현재는 DnD 전 시리즈중에 4판 마스터가 가장 세션 준비가 힘든 마스터라는 견해입니다. 전투 인카운터에서는 창의적이고 유기적인 지형과 전술을 매세션 3,4개 준비해야하고, 스킬 첼린지에서는 말 그래도 북극성 하나만 바라보고 사막을 횡단하는 심정으로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목적한 바를 이룰수 있다고 느끼고 있어요.

-해서 결국엔 위자드가 제공하는 서플리먼트, 이제는 아예 인카운터(모듈)는 물론이요, 보드와 말판, 카드까지 구매(혹은 자작)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어찌보면 성공적인 게임 개발 모델일지도 모르겠군요.;;
Commented by Wishsong at 2009/12/01 16:19
대충대충 지도를 만들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버틸만하더라고요(...) 아주 창의적인 지형이 아니더라도 스토리와 깊이 연계된 전투라면 플레이어들이 공감하면서 즐기는 것 같습니다.

근데 스킬 챌린지는 정말로 만드는 게 고생입니다;
Commented by Wishsong at 2009/12/01 16:20
아직까지는 룰북과 DDI 구입 정도로 버티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도 최원님처럼 구입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ㅠ_ㅠ
Commented by loony at 2009/12/03 04:44
4명으로 팔라-클레-로그-위저의 코어 파티로진행중인데. 보면 확실히 개성이 줄긴 했습니다. 독 레지가 있는 로그가 팔라딘만큼 탱킹 잘할 때도 있고. 공간만 좁으면 위저드가 스트라이커 몇배 데미지를 뽑거나 클레릭의 한방이 스트라이커를 넘기도 하고.
동시에 그래도 아기자기한 개성들이 캐릭터의 고유성을 돌출시키는걸 보면 디자인이 꽤 잘된거 같긴 합니다.
Commented by Wishsong at 2009/12/03 06:37
확실히 전투 하나만큼은 훨씬 재미있어졌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마스터가 그 특징을 제대로 살려주지 못하면 밋밋해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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