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생각난 것.
몇 년 전에 "규칙의 중요성" 을 가지고 세션에서 성일님하고 잠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문득 내가 진짜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깨달아서 잊기 전에 적는다.

그때 나는 "성일님이 규칙의 중요성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라고 이야기했었고, 성일님은 "규칙은 이야기의 변수를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무슨 이야기이냐." 라고 답변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성일님은 규칙은 이야기에 종속된 요소일 뿐이며, 이야기에 변화를 주는 역할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규칙의 의의는 그 뿐만이 아니다. 규칙 자체가 이야기를 규정하고, 규칙에 따라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서 포도원의 개들 같은 경우는 규칙 자체가 "갈등의 한계를 시험하는 이야기"를 만들며, 마우스 가드의 경우는 임무-개인 볼일  이런 패턴으로 시나리오가 구성된다. 인디 RPG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D&D는 '판타지 세계에서 모험하는 영웅들'의 이야기에 적합하며, 최근 나오는 FATE의 면모(Aspect) 개념은 플레이어들이 메타게임적인 방식으로 시나리오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성일님이 이야기하는 RPG 규칙은 그런 서술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제거된, 순수하게 성공과 실패만을 결정하는 보조도구일 뿐이다. 바로 겁스 같은.

성일님이 '히어로 포인트' '어스펙트' '페이트 포인트' 같은 도구를 싫어하는 이유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성일님이 제창하는 합의식 RPG에는 저렇게 서술에 관여하는 부가규칙은 불필요한 자전거 보조바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테니. 반면 나는 그런 부가규칙 자체가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즐긴다.

by Wishsong | 2011/11/15 23:47 | RPG | 트랙백 | 덧글(14)
트랙백 주소 : http://Wishsong.egloos.com/tb/464576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샤이엔 at 2011/11/16 08:07
처음 trpg를 할 땐 디엔디 클래식 하는 주제에 룰을 무시하고 그냥 보조도구 혹은 그 이하로만 취급했었었네요. 덕분에 PC통신에서 원로(..) 아저씨들에게 용감하게 시비도 걸고 (당시에는 그런 용어가 없었지만) 키배도 뜨고..

지금은 위시송님이 정리해주신것처럼 부가규칙과 어떤 시스템 자체를 장난감(표현 멋집니다. 애매했었는데 딱 잡혀버리는 느낌)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즐기는 타입입니다.
그래도 그런 보조 도구 없이도, 특히 '겁스'를 즐기는 게이머라면, 기본적인 팀원의 역량과 합의를 기반으로 그런 보조 바퀴(도 정말 적절한 표현이네요) 무용론을 주장할 수 있겠고 충분히 납득이 가는 주장입니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아이디어와 독특한 게임들이 넘쳐나는데 그걸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 라고 생각해서 후자가 답답하게 느껴질 수 도 있는데...
애초에 TRPG라는 게임의 특성상 심지어 AD&D로만 20년을 하고도 아직도 계속 재미를 느끼고 그것만 하시는 팀도 있는데, '겁스' 시스템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냥 평생 게임으로서 얻을 수 있는 효용이 전자의 입장보다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서로간에 상대를 설득할 필요성은 적은 것 같습니다.

조금 사족이 되겠지만, 전자는 소비자쪽에 후자는 생산자쪽에 가까운 입장을 표방하는 느낌도 많이 받습니다. 괜히 시간과 노력을 날리고 시행착오를 겪고 할 거 없이 그냥 이 많은 시스템 중에 취향에 맞는 좋은 거 사서 그냥 하면 되잖아? 해보지 못한 좋은 게임이 얼마나 많은데! vs trpg(겁스)특성상 팀원들의 합의(역량)로 그냥 모두 구현 가능한데? 게임을 새로 익혀도 어차피 내용은 합의로 만들고 같은 사람들이 하는거잖아? 같은 느낌.

Commented by Wishsong at 2011/11/17 11:03
생각해보니, 성일님은 국문판 겁스를 판매하는 입장이기도 하니 겁스로 즐길 수 있는 RPG 론을 적극적으로 주창하시는 것도 자연스럽네요.
Commented by myst at 2011/11/16 14:16
20세기 이전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있어 주요 테마는 컨텐츠의 메세지가 어떻게 이용자에게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20세기 후반부터 마샬 맥루언등을 비롯한 학자들은 반대로, 미디어 자체가 메세지다- 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 자체가 사용자의 경험과 컨텐츠의 내용 결정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인터넷 뉴스, 유튜브같은 매체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21세기는 이런 이론들이 시행착오를 거쳐, 미디어 생태계 이론으로 발전했지만 큰틀은 비슷합니다. RPG에 있어 시스템에 대한 논의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시스템을 단순히 메세지를 전달하는(내러티브) 장치로만 이해하는 것은 반쪽짜리 이해입니다. 시스템 자체가 내러티브 구조에 영향을 끼치고, 심지어 어떤 내러티브가 될 것인지 결정하기도 합니다. 이를 무시하고 내러티브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흡사 20세기 이전의 커뮤니케이션 연구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시스템이 가진 구조가 어떻게 내용을 결정하고 참가자의 의사소통과 의사결정 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라고 봅니다.

Commented by Wishsong at 2011/11/17 11:14
최근 RPG의 경우 점점 규칙이 이야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추세를 싫어하는 분들도 있지만, 결국에는 myst님 이야기처럼 "규칙이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RPG가 다른 RPG와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소는 결국 규칙이니까요. 특히 최근처럼 '아이디어'를 내세우는 인디 RPG들이 많이 나오는 이 때에는 말이죠.
Commented by 기생수 at 2011/11/17 11:16
그러니까... 합의식 플레이가 겁스 시스템의 특성에 강하게 영향받고 (댓글로 봐선) 겁스 판매에도 연관되어 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일단 그렇게 읽히는데...

혹시 이야기와 규칙의 관계에 있어서 그거보단 좀더 포괄적인 담론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거라면 이렇게 적으시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도요.(이걸 의도하셨던거라면 할말없구요.)

논의 외적인 이유를 찾아서 스스로 납득하는 건 개인의 자유지만 역지사지는 필요할 것 같아요.
Commented by Wishsong at 2011/11/17 11:41
겁스의 경우 규칙이 서술권에 미치는 영향을 최대한 줄이고(행동의 성공과 실패 정도로), 샤이엔 님 말씀대로 나머지 부분을 팀원들의 합의로 돌린 규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확장시키자면, 과거에 만들어진 범용 RPG는 대부분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굳이 겁스 시스템의 특성을 이야기하자면 "현실성에 기반한다"인데, 물론 던전 판타지나 초상능력의 경우도 있지만, 결국 겁스의 특색은 벗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일님이 겁스를 판매하는 입장이기도 하니..." 부분은 갑자기 생각난 걸 적은 건데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이나보군요;

다만 저는 그걸 결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판매하는 상품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무척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저 멘트가 부정적으로 보이셨다면 성일님과 기생수 두 분께 사과드리겠습니다.
Commented by Wishsong at 2011/11/17 11:52
(논의하고는 관계없이) 조금 더 사족을 붙이자면, 현재 한국에 나온 RPG가 겁스 밖에 없는 만큼, 현재 겁스를 판매하시는 성일님이 저렇게 겁스를 즐길 수 있는 방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건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시나리오 같은 추가 자료를 더 만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한 적도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성일님과 또 한 번 논쟁을 벌였던 것 같지만(...) )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저렇게 "고기를 잡는 방식"을 가르쳐주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일님 자신도 기존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에 의한 방식이니만큼, 저런 자료를 만드시는 쪽이 더 좋을 것 같고요.
Commented by 기생수 at 2011/11/17 11:59
뭐... 사실은 겁스도 옛날 시스템이다보니 합의로 돌린다기보단 전통적으로 마스터가 토해내는 걸 플레이어가 받아먹는 식으로 돌린다거나 할 수 있고 그게 원래의 정석에 가까워 보이긴 해요. (합의식 플레이 운운하기 훠얼씬전에 만들어졌으니까요) 겁스는 도구적 특성이 강해서 저런 합의식 플레이에도 **유용한 도구 중 하나** 가 되는 거였죠. 그래서... 합의식 플레이가 겁스의 특성에서 도출된거라는 논점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구요. (성일님도 여러시스템 해볼만큼 해보셨던것 같기도 하고)

다만 포괄적 이론이나 개념으로 말씀하시는게 상품판매의 수단으로 이해되는 건 성일님 본인 입장에선 바라시진 않을것 같지만... 뭐 제가 성일님 대변인도 아니고 그냥 일반론에서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저한테 죄송할건 하나도 없습니다 ^^;;)
Commented by Wishsong at 2011/11/17 12:40
음. 부연 설명을 붙이자면, "합의식 플레이가 겁스의 특성에서 도출되었다" 라기 보다는, 겁스의 무특성(?) 때문에 성일님이 생각하시는 합의식 플레이에 맞다고 봅니다. 성일님이 추구하는 플레이는 자유로운 합의인데, 히어로 포인트나 페이트 포인트 같이 서술을 '도와주는' 규칙은 결국에는 자유로운 합의를 막는 제약이 되기 때문에 저런 제한사항이 가장 덜한 겁스를 좋아하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협소설로 말하자면 "검의 극에 달한 자는 검이라는 형태에 구속받지 말아야 한다." 라는 식일까요.
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하악하악 이 검은 이래서 좋고 저 검은 저래서 좋아"라는 도검 덕후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검(규칙)을 수집하는 거고요.
Commented by Wishsong at 2011/11/17 12:43
조금 더 추가하자면... 기존 RPG에서 흔히 나타나는 GM이 일방적으로 플레이어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정보를 통제하는 문제에 대해서 성일님은 "플레이 방식을 바꾸자"고 말씀하는 거고, 저 같은 경우는 "규칙을 고쳐보자." 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고요.
Commented by 로키 at 2011/11/18 13:14
결국 같은 목적에 대해 방법이 다를 뿐인데, 목적이 같은 사람끼리 말다툼하고 감정 상하고 눈치보고 말 조심해야 하는 안 웃긴 개그라는 거죠.
Commented by 실버 at 2011/11/18 17:32
겁스는 그런거 아니에요 ㅠㅠㅠㅠㅠ 겁스 마스터가 소심하게 외치고 갑니다.(...)

농담이고, 겁스야 말로 전통적인 마스터링 기법에 적합하게 짜여 있는 룰이죠. 룰마다 분명히 한계가 있고, 전 다양한 룰을 다 즐겨보자는 파이긴 한데, 플레이어들이 룰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지 않을 경우에 겁스만한 룰을 찾기가 힘든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다루는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쓰는 사람이 도구를 보는 시각의 문제인거 같아서, 겁스와 비겁스의 문제는 아닌듯해요 '~' 겁스룰도 변칙적인 옵션들이 많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역시나 저런 합의식(?) 플레이를 할거면 플레이어의 서술권이나 시나리오 접근 권한을 룰적으로 허용하거나 제공하는 룰로 하는게 더 낫지 않나 싶어서 오묘하네요. '~' 그 룰들의 장점을 극대화 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혹은 겁스보다 좀 더 허술한 룰이 더 편하지 않나 싶어요.
Commented by Wishsong at 2011/11/21 00:09
겁스는 뭐랄까... 물 같은 RPG라서, 마스터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느낌도 크게 다른 것 같아요. 저는 그냥 귀찮아서 각각의 특성에 맞는 룰을 찾지만(...)

합의식 플레이를 할 경우, 룰은 확실히 간단한 편이 좋아요. "미리 준비"를 하지 않는 만큼, 새로운 데이터를 만드는 속도가 빨라야죠.
Commented by 기생수 at 2011/12/13 11:11
로키 // 뭐... 큰 맥락에서 세세하게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없어서 길게 이야기 안한면도 있으니, 그렇게 정리하시면 난처하네요. ㅎ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소망의 나라에는 겨울이 없다. -러시아 속담-
by Wishsong
Calendar
어딘가의 글
찰스 디킨스 :

미루는 버릇은 시간도둑이니, 당장 잡으라.
카테고리
전체
나와 주변의 일.
세상의 일들.
내가 즐기는 것들
RPG
Transhuman Space
읽은 책들
군 이야기(중단)
영어 일기(중단)
미분류
최근 등록된 덧글
저 엔터테인먼트 관련 ..
by Dust at 08/12
생체 군인들이 사이버쉘..
by Dust at 08/12
아ㅏㅇ 앙 기모띠!
by 선주영 at 07/07
단어가 너무 어려운 단어..
by jinim at 05/10
꼭 저대로 실현되기를. ..
by 트랜스휴매니스트 at 11/19
4번은 마스터만 잘 알아..
by Wishsong at 08/06
와, 1,2,3,4 전부 적극..
by 샤이엔 at 08/06
실제로 해 보면 그 "제 때..
by Wishsong at 06/29
제 때 제대로만 내주면 돈..
by 바이라바 at 06/28
감사합니다! 본격적으로..
by Wishsong at 06/25
최근 등록된 트랙백
텀블벅 던전월드 국문판..
by The Adamantine Watc..
토먼트 : 누메네라의 파도..
by The Adamantine Watc..
레이 브래드버리의 명복..
by 잠보니스틱스
브래드버리 별세
by ☆드림노트2☆
FATE 시스템 면모(As..
by The Adamantine Watc..
이 글을 잃고 문득 생각났..
by 지나가던이의 스쳐지나가..
묻겠다! 그대가 나의 마..
by 기아스를 올바르게 사용..
생각해보니, 너드라고 ..
by The Adamantine Watc..
죄, 참회와 회개에 대한..
by The Adamantine Watc..
LG-LU6500 사흘 동안 사..
by The Adamantine Watc..
태그
어포칼립스월드 MECHA RPG 테크누아르 크라우드펀딩 Sagas_of_the_Icelanders 포도원의개들 Sixth_World 셜록홈즈 비커밍 The_Quiet_Year FATE 리뷰 기독교 누메네라 번역 인디RPG 아이패드에어 윤창중 마이크로스코프 추리소설 메카RPG TRPG 일상 만화 메카 오만과편견 몽쉐귀르1244 던전월드 정교회
전체보기
rss

skin by zodiac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