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떻게 여기서 살게 되었나(How We Came To Live Here) : 북미 원주민의 옛날 이야기.


"잘 들어라, 이건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야."


'우리가 어떻게 여기서 살게 되었나'(How We Came To Live Here, 이하 HWCTLH)는 갈릴레오 게임즈(Galileo Games)에서 만든 스토리텔링 게임으로, 북미 원주민들("인디언")의 이야기를 다룬 RPG입니다.  예전에 구입하고 읽기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최근에 완독했습니다.

HWCTLH는 여러모로 독특한 RPG입니다. 다른 RPG에서 거의 다루지 않던 북미 원주민들의 문화(북미대륙 남서부의 "아나사지(Anasazi)" 문명을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를 RPG로 다룬 점도 특이하지만, 이 문화를 RPG로 구현하기 위한 규칙 역시 무척 개성적이면서 재미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RPG와는 다른 HWCTLH만의 특성은 어떤 점이 있을까요?


1. 마을 중심의 이야기 구조 

앞에서 말했듯 HWCTLH는 북미 원주민들을 다룬 RPG입니다. 모험자들이 땅굴을 탐험하고 왕국을 정복하는 흰 피부 사람들과는 달리 HWCTLH의 모든 이야기는 마을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PC들은 마을의 구성원이 되어 마을 안팎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2. 북미 원주민들의 삶과 문화가 녹아든 캐릭터 메이킹.

HWCTLH의 캐릭터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웃사이더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크고 작은 혈족의 일원이며, 마을 내에서는 '키바(kiva)'라는 비밀 공동체에서 활동을 합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엄격하기 때문에 남녀가 각각 할 수 있는 행동과 들어갈 수 있는 공동체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반영하기 위해 HWCTLH의 캐릭터들은 자신이 선택한 혈족과 비밀 공동체에 따라 특성과 결점을 가지며, 같은 능력치를 가진 캐릭터도 성별에 따라 특기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힘 수치가 높은 남자는 "용감함" "잔혹함" "인내심이 강함" "존경받음"등의 특성을 가진 반면, 힘 능력치가 높은 여성은 "자존심 세우기" "지혜 쓰기" "대화하기" "도구 활용"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이름 또한 북미 원주민 식으로 지어야 합니다.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주먹 쥐고 일어서" 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겁니다. 적절한 이름은 관련 판정에서 보너스를 받습니다. 예를 들어서 "맨 먼처 창을 휘두르는 남자"라는 이름을 지으면 전투에서 유리합니다.


3. 마스터가 두 명!

HWCTHL는 마스터가 두 명입니다. 이 둘은 각각 마을 "외부"와 "내부"를 맡아 서로 협력하면서 다른 참가자들을 괴롭힙니다. 마을 외부는 자연재해, 이웃마을, 외지인, 괴물 등 마을 바깥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협하는 요소이며, 마을 내부는 마을에 살고 있는 각종 NPC들입니다. 이 두 명은 다른 PC들과 함께 교대로 장면을 만들면서 이야기를 이끌고 PC들을 시련에 빠뜨립니다.   
 

4.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갈등 판정. 이기기 위해서는 타락해야 한다.

HWCTLH는 포도원의 개들과 유사한 방식의 갈등 판정 방식을 사용합니다. 양 측은 각자의 특성과 능력을 이용해 주사위를 최대한 끌어모으고, 이 주사위로 공격과 방어를 하면서 승리 점수(Victory Point)를 얻습니다. 양 측의 주사위가 다 떨어지면 지금까지 얻은 승리점수를 사용해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만듭니다. 예를 들어서 승리 점수를 2점 쓰면 마을 내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있고, 5점을 사용해서 NPC 한 명을 이야기에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즉, 승리 점수가 더 높을수록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더욱 커진다는 말이죠. 

필연적으로 PC들은 더 많은 승리 점수를 벌기 위해 온갖 방법(판정에 사용할 주사위를 모으는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특성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 때 입은 빚은 이후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그 결과 많은 인물들이 쉽고 빠른 수단인 "죄"에 의존하게 됩니다.

죄는 마을의 전통을 어기거나 친구와 한 맹세를 깨뜨리는 행위부터 폭행, 강도, 흑마술, 살인, 혈족에 대한 살인까지 여러가지 죄악을 포함합니다. PC들은 더욱 큰 죄를 저지를수록 더욱 많은 주사위를 얻지만 그만큼 타락하게 됩니다. '나쁜 짓을 저지르다가 미움받는 괴물로 바뀌어 마을을 영원히 떠난 남자'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큰 죄를 저지른 자들의 말로는 항상 비참합니다. 


5. 결론

HWCTLH의 세계는 바다 건너 피부 하얀 친구들의 삶을 본딴 타 RPG처럼 웅장하지는 않습니다. 사건은 항상 마을과 마을 주변에서만 벌어지며, 주인공들은 탐욕을 부리다 파멸하거나 무사히 할 일을 마치고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고 조용하게 삽니다. 하지만 HWCTLH에서는 낯설면서도 매력적인, 북미 원주민들의 문화와 생각이 녹아 있는 '옛날 이야기'를 생생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마을에 닥친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먼저 달리는 남자"나 "곡물을 가져오는 여자"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by Wishsong | 2012/05/08 17:07 | RPG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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