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 크라우드 펀딩 진행하기.

RPG 펀딩 이야기가 트위터 타임라인에 조금씩 보이네요. 크라우드 펀딩을 직접 했고(링크), 앞으로도 할 사람으로서 몇 가지 느낀 점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 글은 스스로 반성할 점을 짚어보는 글이기도 합니다.

제 시각에 국한된 이야기라 무의식적인 편견이나 오해가 섞일 수도 있으니 정 마음에 안 드시면 지적해 주셔도 좋습니다.

 

1. 크라우드 펀딩을 하는 이유: 최소자금 확보와 홍보

자금 문제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여러 사람이 지적한 대로 펀딩의 목적은 "수익"이 아니라 책을 찍을 수 있는 "최소자금 확보"라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목표액수보다도 더 큰 금액을 얻었다고요? 대부분은 추가 목표로 내건 약속들을 실현하기 위해 다 씁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알게 모르게 많은 돈이 나갑니다. 특히 처음 펀딩을 진행할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돈이 나갑니다. 제가 저번에 했던 '폴라리스' 펀딩도 결과만 보자면 살짝 적자였습니다. 만약 크라우드 펀딩 없이 그대로 냈다면 집 기둥뿌리가 흔들렸을 겁니다.

그리고 크라우드 펀딩은 홍보 측면에서 무척 유리합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책을 내놓지 않았더라면 후원자들이 해당 프로젝트를 SNS로 퍼뜨리거나, 언론매체에서 관심을 가지는(제 경우는 아니었지만) 일이 없겠지요.

영세한 한국 RPG 시장 규모로 볼 때, 곧바로 RPG책을 내놓는 건 여러모로 큰 모험입니다. 몇년 전까지 한국 유일의 RPG 출판사였던 초여명의 경우를 보시면 크라우드 펀딩을 도입하기 전과 후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크라우드 펀딩이 아니었다면 뱀파이어 : 더 마스커레이드 20주년 판, 누메네라 같은 대작들이 한국에 나오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2. 크라우드 펀딩의 시간 문제 : 독자적인 내용과 외부 인력의 비율. 그리고 프로젝트 진행자 자신.

 저번 크라우드 펀딩인 폴라리스는 결과적으로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늦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얼마나 독자적인 계획이 들어가느냐, 외부 인력을 얼마나 많이 쓰는가, 그리고 프로젝트 진행자 자신을 얼마나 관리하느냐에 따라 시간이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독자적인 내용 : 우선 번역서가 직접 만드는 규칙보다 만들기 훨씬 쉽다는 건 모두 짐작할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룰북 내용보다도 디자인과 삽화에 있습니다. 제 경험상 룰북의 내용보다도 독자적인 삽화와 디자인을 만드는 데 더 큰 시간이 듭니다.

번역서는 원 책의 삽화와 레이아웃에 그대로 한글 텍스트를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초여명의 <던전 월드> 같은 경우는 번역 작품이면서 삽화와 레이아웃을 새로 만든 경우이지만, 초여명이 갖춘 노하우와 실력 덕분에 기한 내에 출시됐습니다.

폴라리스는 어땠을까요? 이 또한 번역서이면서 삽화/레이아웃을 새로 만든 책이지만, 아쉽게도 제 미숙함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물론 한국어판 폴라리스는 원판 이상으로 예쁘다고 자부하지만, 시간이 지체된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독자적인 내용을 준비하는 데 드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요? 펀딩 전 최대한 준비를 해 놓는 게 정답이지만, 사전 준비에 비용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펀딩 전 삽화 및 디자인을 준비한다면 그만큼 삽화가와 디자이너에게 돈을 내야지요. 그러고도 펀딩에 실패한다면...? 그게 바로 ‘리스크’이지요. 사전 준비에서 드는 ‘리스크’를 얼마나 감수할지는 프로젝트 진행자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사전 준비를 많이 할수록 펀딩 후 제작 시간이 줄어드는 건 확실합니다. 최소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해 놓고 펀딩을 시작하세요.

또한, 추가 목표를 주의 깊게 설정하세요. 추가 목표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계획이 있다면, 이 또한 시간을 지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단순히 물건을 사는 정도로 그친다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독자적인 자료집을 낸다면? 혹은 리플레이집을 낸다면? 그만큼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하세요.

극단적인 사례로, 크라우드 펀딩으로 발표한 <Technoir>는 제작자가 ‘창의성이 고갈된 탓에’ 추가목표로 설정한 자료집을 내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원망을 듣고 있습니다. 규칙 자체는 무척 훌륭한 RPG이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외부 인력의 비율 : 삽화가가 그림을 늦게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번역가가 번역한 텍스트를 줬는데 엉망이라면? 도와주기로 했던 사람이 나 몰라라 관둔다면?

이런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정말로요. 일해 주기로 한 사람이 돈을 받고 그대로 잠적해버려서(...) 큰 차질을 빚은 프로젝트도 본 적이 있지요.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진행하려면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람들을 얼마나 통제하고 일정을 관리하느냐가 핵심입니다. 많은 사람이 참여할수록 더욱 어렵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이 아닐수록 더욱 어렵습니다(아니, 어쩌면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지체되는 사정을 알면서 독촉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요). 시간이 지체된다면 가차 없이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만큼 돈도 더 들고 질이 괜찮아질 거라는 보장도 없지요.

이런 변수를 최소화하려면 철저한 사전 준비와 검증, 그리고 세밀한 계획(외부인력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이 필요합니다. 사전 준비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작업한 이전 성과를 보고 주위 사람들의 평을 들어보세요. 물론 과감하게 “무명의 신인”을 기용할 수도 있지만, 옥이 될 것이냐, 돌이 될 것이냐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세밀한 계획이란 ‘이 사람한테 어떤 일을 시킬지 사전에 설명하고, 그대로 시행하는 일’ 입니다. 사전에 서로 계획을 세운 대로 시행하라고 독촉할 수 있으니까요. 외주인원은 시킨 일만 합니다. 그래서 계획은 세밀할수록 좋습니다. 폴라리스가 지연된 이유도 이 부분을 제가 잘 몰랐던 부분이 큽니다.

프로젝트 진행자 자신 :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로젝트 기간을 길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프로젝트 진행자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Exalted 3rd> 은 프로젝트 진행자가 큰 병에 걸려서 시간이 크게 지체됐습니다. 후원자들은 병에 걸린 사람을 뭐라고 할 수도 없으니 가슴앓이만 했고요.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변수는 매우 많습니다. 본업이(프로젝트가 본업이 아닌 한) 바빠져서 이쪽에 투자할 시간이 적어진다면? 연인과 싸워서 일할 정신 상태가 아니라면? “훌륭한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지금까지 만든 일을 갈아엎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결정한다면?

프로젝트 진행자 본인이 프로젝트 연기에 영향을 주는 사례는 그 종류가 너무 많아 무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폴라리스를 할 때 개인적인 문제를 겪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굳건하게 마음을 먹으세요. 흔들리지 마세요. 여러분이 어떤 일을 겪어서 프로젝트를 늦춘다고 해서 후원자들이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아무리 중간에 훌륭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더라도, 프로젝트를 지체할 변수가 된다면 과감히 포기하세요.

일단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크라우드 펀딩에 도전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한 번쯤은 이런 요소를 고려해 보세요.

by Wishsong | 2015/06/25 11:15 | RPG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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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랄원영 at 2015/06/25 11:50
최근 TRPG 관련 펀딩을 보면서 꽤 가슴앓이 했던 부분을 명확하게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의와 호의와 신뢰로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돈줄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기분이 들어서 영 불편하던 참이었습니다.
Commented by Wishsong at 2015/06/25 11:54
스스로 반성할 점이 많아서 글을 적어봤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Commented by 바이라바 at 2015/06/28 13:20
제 때 제대로만 내주면 돈 먹는 게 무슨 죄인가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펀딩참가자도 미리 돈을 내서 얻는 편익도 상당하거든요. 상업성 추구(물론 선은 있지만요)야 말로 프로가 되는 데 전제인데 왜 프로가 되냐고 따지면 더 할 말이 없죠. 사실 저는 자꾸 추가목표를 낼 필요가 없다고 보거든요. 책 발매 연기의 합리적인 근거가 되니까요(...).
Commented by Wishsong at 2015/06/29 00:15
실제로 해 보면 그 "제 때 제대로"를 막는 장애물이 반드시 튀어나오더라고요. 그걸 얼마나 잘 제어하느냐가 출판사의 실력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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