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헬보이
2008/10/15   헬보이, 운명을 거부한 악마의 아들. [9]
헬보이, 운명을 거부한 악마의 아들.


맨처음 헬보이를 알게 된 것은 '스스로 뿔을 잘라버리고 운명에 맞서는 악마의 아들'이라는 컨셉을 내세우는 영화 <헬보이> 포스터를 보았을 때부터였다. 영화 자체는 약간 독특한 분위기의 히어로 액션물 정도였지만, 헬보이의 투박하면서도 박력 있는 모습은 머리 속에 깊숙하게 남게 되었다.

<헬보이> 코믹스는 영화와는 여러모로 다르다. 화려한 액션물인 영화와는 달리, 만화는 기본적으로 크툴루 신화에 영향을 받은 오컬트 공포물에 더욱 가깝다. 각 에피소드마다 죽을 사람은 가차없이 죽으며(!), 결말 또한 시원한 마무리 없이 그 너머의 숨겨진 무언가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인 헬보이는 영화와는 달리 리즈와 로맨틱한 관계로 이어지지도 않고(오히려 만화 속에 나오는 다른 여성인 케이트 코리건 박사와 더욱 가깝게 지내는 것 같다. 이 쪽도 동료 관계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영화에서 종종 발휘하던 유머센스 또한 그다지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퉁명스럽고(노인들에게는 예의 바르지만), 약간은 수줍음마저 타는 성격이라고 해야 할까? 헬보이의 동료인 에이브도 영화에서 보여준 훈훈한(?) 모습 대신 더욱 어둡고 냉철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 만화의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가 영화보다 훨씬 음울하다.

코믹스 전 권을 관통하는 전반적인 주제는 헬보이가 자신의 운명에 맞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이다. 물론 영화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단 두 편의 내용만으로 만화의 긴 호흡을 따라잡기에는 힘든 것 같다(못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1권부터 5권까지 걸쳐 그와 마주치는 영적 존재(라스푸틴, 헤카테, 아스타롯 등등)들은 그를 적대하든 방관하든, 그가 언젠가 이 세상에 파멸을 불러일으킬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를 악마의 아들, ‘아눙 운 라마’로서 대우한다. 하지만 그 때마다 - 자신의 본성이 드러나면서 뿔이 자라날 때마다 - 헬보이는 자신의 운명을 강하게 거부하며 뿔을 꺾는다.

헬보이가 자신의 본성을 거부하는 것은 역시 양부인 트레버 브룸, 그리고 B.P.R.D 사람들 덕택인 걸까. 다행히도(?) B.P.R.D에 소속된 사람들 중 중요인물들이 헬보이만큼이나 초자연적 존재들이라서 편견이 덜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4권의 맨 처음에 소개된 2쪽 짜리 단편 에피소드 <팬케이크>에서는 어린 헬보이가 팬케이크의 맛에 반해버리고, 지옥에서는 헬보이가 팬케이크를 먹었다면서 절망과 탄식에 휩싸이는 장면이 나온다. 헬보이는 그 때부터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헬보이의 내면의 고귀함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 – 헬보이가 가진 가장 큰 모순이자 매력 - 은, 개인적으로 4권에 수록된 단편 중 용 사냥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과거 용을 퇴치했던 수도사가 흘린 피가 스며든 땅에 백합이 피어났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어느 지방에서, 헬보이는 다시 힘을 회복한 용을 무찌른다. 그리고 그의 피가 떨어진 땅에서는 전설과 마찬가지로 백합이 피어난다.

헬보이가 B.P.R.D를 그만두는 이유조차도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이다. 그는 B.P.R.D가 자신의 동료인 호문클루스 로저를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폭탄을 로저의 몸 안에 장착한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탈퇴를 선언했다.

헬보이는 앞으로도 수많은 자신의 운명에 관련된 도전과 시련, 유혹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헬보이는 그 때마다 자신 앞에 놓여진 난관을 여지없이 “파멸의 오른손”으로 (세상의 종말의 비밀을 담고 있는 오른손이지만, 헬보이에게는 단순한 쇠주먹일 뿐이다!) 후려치면서 극복해나갈 것이다. 그것이 이 만화에서 보여주는 가장 큰 주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헬보이가 그토록 인기를 끄는 것이니까.

by Wishsong | 2008/10/15 11:44 | 내가 즐기는 것들 | 트랙백 | 덧글(9)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소망의 나라에는 겨울이 없다. -러시아 속담-
by Wishsong
Calendar
어딘가의 글
찰스 디킨스 :

미루는 버릇은 시간도둑이니, 당장 잡으라.
카테고리
전체
나와 주변의 일.
세상의 일들.
내가 즐기는 것들
RPG
Transhuman Space
읽은 책들
군 이야기(중단)
영어 일기(중단)
미분류
최근 등록된 덧글
저 엔터테인먼트 관련 ..
by Dust at 08/12
생체 군인들이 사이버쉘..
by Dust at 08/12
아ㅏㅇ 앙 기모띠!
by 선주영 at 07/07
단어가 너무 어려운 단어..
by jinim at 05/10
꼭 저대로 실현되기를. ..
by 트랜스휴매니스트 at 11/19
4번은 마스터만 잘 알아..
by Wishsong at 08/06
와, 1,2,3,4 전부 적극..
by 샤이엔 at 08/06
실제로 해 보면 그 "제 때..
by Wishsong at 06/29
제 때 제대로만 내주면 돈..
by 바이라바 at 06/28
감사합니다! 본격적으로..
by Wishsong at 06/25
최근 등록된 트랙백
텀블벅 던전월드 국문판..
by The Adamantine Watc..
토먼트 : 누메네라의 파도..
by The Adamantine Watc..
레이 브래드버리의 명복..
by 잠보니스틱스
브래드버리 별세
by ☆드림노트2☆
FATE 시스템 면모(As..
by The Adamantine Watc..
이 글을 잃고 문득 생각났..
by 지나가던이의 스쳐지나가..
묻겠다! 그대가 나의 마..
by 기아스를 올바르게 사용..
생각해보니, 너드라고 ..
by The Adamantine Watc..
죄, 참회와 회개에 대한..
by The Adamantine Watc..
LG-LU6500 사흘 동안 사..
by The Adamantine Watc..
태그
윤창중 Sagas_of_the_Icelanders 일상 마이크로스코프 정교회 포도원의개들 던전월드 번역 어포칼립스월드 셜록홈즈 비커밍 인디RPG 오만과편견 누메네라 The_Quiet_Year RPG 메카 추리소설 만화 FATE MECHA Sixth_World 테크누아르 크라우드펀딩 아이패드에어 몽쉐귀르1244 TRPG 기독교 메카RPG 리뷰
전체보기
rss

skin by zodiac47